송일섭 염우구박인문학교실 운영자
  • ▲ ⓒ송일섭 시인
    ▲ ⓒ송일섭 시인
    며칠 전, 전주덕진공원 근처에서 일을 보고 시간이 남길래 모처럼 산책이나 할 셈으로 덕진공원에 들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늑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덕진공원이 사막에 들어선 것처럼 황량했다. 출입구 연지문에서부터 덕진호수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설까 하다가 머리를 들어 안쪽을 바라보니 호수의 연꽃이 활짝 피어 방실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몇몇 시민들이 그곳에서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가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공원에 올 때마다 보았던 원형 광장에 있던 시비(詩碑)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하는 아저씨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예전에 이곳에 시비(詩碑)가 몇 개 있었는데, 다 어디로 갔어요?”

    현장 인부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모른다는 뜻이리라. 근처 어디라도 따로 보관하고 있을 것 같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 시비(詩碑)들은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특별히 시비(詩碑)에 신경을 쓴 이유는 개인적 체험과 경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전북문학관에서 근무할 때 전북의 ‘작고 문인의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곳을 방문하여 이철균 시인의 시비(詩碑)를 직접 답사한 일이 있었다.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공사가 완료된 다음에 다시 설치하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인부들의 작업 현장을 서서히 빠져나와 연꽃이 활짝 피어 있는 호수 쪽으로 갔다. 향기에 취한 채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다음, 호수 가운데에 있는 연지도서관에 들러서 땀을 식혔다. 덕진호수는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된 곳이다. 이곳 연꽃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해마다 여름이 되면 만개한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공원을 빠져나와 덕진노인복지회관 쪽으로 걸으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없어진 시비(詩碑)들이 아른거렸다. 그러고 걷고 있는데, 공원 안내판에 적힌 공원녹지과(?)의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걸어 시비(詩碑)에 관한 내용을 문의했더니, 소관부서가 아니라면서 잘 모른다면서 담당 공무원을 바꿔 주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물었다. 철거된 시비(詩碑)는 어디 있으며, 공사가 끝나면 다시 세울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과는 어긋난 답변을 했다. 덕진공원에서 철거된 시비(詩碑)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앞에 있는 체련공원에 설치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때 필자는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아니, 전주를 대표하는 전주덕진공원에 시비(詩碑) 하나 세우지 않는 것이 누구 발상입니까? 전주덕진공원은 전주의 얼굴이요, 전주의 심장 아닙니까? 새로 시비(詩碑)를 추가 설치해도 부족할 판인데, 있던 시비(詩碑)까지 없앤다니 도대체 그게 누구의 생각입니까?”

    실제로는 여기에 쓴 내용 이상으로 한참 동안 전주시청 담당자의 안이한 발상을 격정적으로 힐난했다. 물론, 필자와 통화한 직원이 제대로 알고 한 말인지는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필자의 머릿속에는 시비(詩碑) 하나 없는 덕진공원의 삭막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도시공원및녹지등에관한법률에 의하면 도시공원은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여 건전하고 문화적인 도시 생활을 확보하고 공공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동법 제15조에 ‘도시공원의 세분 및 규모’에 따르면 도시공원은 지역생활권 거주자의 보건 및 정서 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설치한다고 규정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부안의 서림공원에는  이매창의 시조를 새긴 시비가 있고, 남원의 춘양테마파크에는 춘향의 정절과 사랑을 기린 대표 시비가 있다. 장수의 공원에는 논개의 ‘불멸의 애국혼’을 그려놓은 시비가 있다. 최근에는 개인 정원에도 시비(詩碑)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장수 이정만 씨의 정원에는 전북 문인의 시편을 새긴 시비가 즐비하고, 산서면 소재지에는 안도현의 시비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임실의 진메에도 김용택 시인의 시비가 여러 개 있다. 

    그런데, 전주시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덕진공원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있던 시비(詩碑)까지 없애려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전주와 전북을 대표하는 이철균 시인의 〈한낮〉이란 시비를 비롯하여 신석정 시인의 〈내 눈망울에서는〉과 백양촌 신근 시인의 〈강〉이 새겨진 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시민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다. 한때 이들 시비와 나란히 있었던 김해강의 〈금강의 달〉은 그의 친일행각이 드러나면서 그 옆에 〈단죄비〉까지 세워졌지만, 결국 장수의 개인 정원으로 옮겨간 일도 있었다.

    전주의 대표적인 시민공원에 시비(詩碑) 하나 없다면 ‘문화와 예술의 고장’이라 일컫는 전주로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누구의 결단으로 이런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몰라도 시청 공무원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계의 대표자들과 협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시정(市政)의 맨 앞자리에는 항상 시민이 있어야 한다. 관계기관에서는 지금까지의 추진 경과를 밝히고 유관 단체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개선 방안을 마련해 줄 것을 촉구한다.